부재함으로서 오히려 과잉된다는 포맷은 사실 부성에 대한 낭만적인 탐구이며 상상이다.

한 명의 남성이 가정의 권위를 독점하는 가부장제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실상 죽고 죽이는 관계에 가깝기도 하다.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아들이 가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왕좌이다. (이러한 가부장제와 왕권국가 의 연관성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만화라면 여성의 유시진의 <신명기>, 김진의 <바람의 나라>가 있다)

  아마, 이러한 한국가정의 가부장적 성격은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계속해서 그 성격이 변했을 것이다. 벌써 90년대 들어 서 소위 신세대의 가정에 대한 인식은 그 이전과 달랐고, 분명 전통적인 권위적인 성격은 덜해진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한 가 정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속성이거나 특성이고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대충, ‘부성과잉’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과잉’이란 보 통 피해의식의 산물이기 쉽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마다 짊어지고 있는 보편정서적인 부분은 사회적 문화를 형성한다.   


  한국과 대비해서, 일본만화에 ‘부성과잉’은 실상 별로 등장하지 않거나 한국의 그것처럼 집착적이지 않다. 일본만화에서 는 ‘모성과잉’과 함께 ‘부성부재’가 더 강하게 등장하며 그것이 유년기에 대한 하나의 상징처럼 표현된다. (<3x3 Eyes>, <유유백서>, , 등. 유심히 살펴보면 소년만화의 어떤 전형적인 포맷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란 밥을 해 주 는 식모에 다름없는 식의, 모성부재가 농후한 사회인 한국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일본만화에서의 부성부재란 부성과잉의 반대라기 보다는 그 일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토가시 요시히로의 에서 아버지는 부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인식된다. (전작인 <유유백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자신의 일 때문에 자식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아버지라는 형태. 이것은 국가와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직장의 업무를 모든 가치로 치는 일본 아버지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현실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다. 이런 경우에 부재함으로서 오히려 과잉된다는 포맷은 사실 부성에 대한 낭만적인 탐구이며 상상이다.  이것은 실제, 부재에 가깝다.

  그래서 실제 부성과잉이라고 읽힐 수 있는 일본만화들은 대체로 근육마초가 나오는 만화들이 대부분이고 그것은 실제 현실 속의 아버지가 가지는 리얼리티보다는 '압도적인 강함과 폭력'이라는 전형의 구현 쪽에 더 관심을 쏟는다. <격투왕 바키>, <북두의 권>, <베르세르크> 등. 솔직히 현재의 일본만화에는 리얼리티를 가진 ‘가정’이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매우 상징적인 원형의 형태로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의 남성들에게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은가 싶다. '집으로부터 벗어난다'라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다. 아들에게, 유년기란 아버지와의 대결이거나 굴종이고 그 속에서야 겨우 허용되는 애정이다.

   이렇게 애증을 되풀이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업’이나 ‘숙명’과 같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매커니즘으로 표현되는 것이 납득 가능한 사 실성을 얻을 만큼 거대한 사회문화적 체계로 구축되어 있다.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시스템은 사회의 시스템과 연결된다. 권가야의 <남자 이야기>와 윤태호의 <야후>를 보며 이 글에서 살펴볼 것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2. 두 한국만 화, 부성과잉에 모성부재의, 아버지가 죽은 아들 
  여기, 두 한국만화가 있다. 권가야의 <해와 달>, 그리고 윤태호의 <야후>이다. 작품에 대한 여러 소리는 걷어치 우고 살펴보고자 하는 점에만 집중해보자. 두 만화에서 아버지는 죽어있거나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죽는다. 살아있는 아버지는 언젠가 극복하거나 서로 를 용서하면서 피해의식과 과잉을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죽어버린 아버지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은 ‘부성과잉’의 완성형이라고 해 도 좋으리라. 이러한 ‘부성과잉’이 두 작품의 공통적인 부분이다. (록그룹 ‘N.EX.T’의 1집에 수록된 ‘아버지의 무덤’과 같은 곡도 아마 참조가 되리라)  

  작가가 짊어지고 있음이 분명한 이러한 정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아들’이라는 주인공을 구축한다. 일종의 오이디푸 스 콤플렉스의 발현이겠지만, 어차피 이러한 분석은 콩을 콩이라고 부르는 것 만큼이나 의미없는 것이니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고픈 충동에는 일단 브 레이크를 걸어두고 보다 작품에 집중해보자. 


  위의 도판에 보이는 <해와 달>의 주인공인 ‘백일홍’은 두 마리 중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의 강아지, 어미 없는 강아지 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살아남은 강아지는 아버지가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어미 없는 강아지라는 것은 모성이 부재했던 자신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로부터 강대한 무공을 전수받았지만 실제로 내면적으로 나약하고 혼돈스러 운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받자 스스로 호수로 걸어들어가 죽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가부장 제 속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일종의 죽고 죽이는 왕권이양에 대한 통찰로 파악된다. 그러나 긴 세월을 두고 이러한 가부장적 관계는 인간들의 자발 성과 분리되지 않는 정서적 구조를 생성시켰기 때문에 이미 자기 자신과 분리시킬 수 없고 따라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미 그것은 자기 자신 을 형성시킨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권가야는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의 강력한 개인주의적 자의식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도 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자의식의 확장이라는 길을 택하여, 일종의 도(道)의 추구나, 선(仙)의 추구, 혹은 초현실주의, 혹은 그 어느 쪽 도 아니거나 그 모든 것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실보다는 본질에 대한 질문에 천착한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구체적 인 현실을 넘어서 어떤 거대한 본질의 문제와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가야의 <해와 달>은 지독하게 비 약하며 지독하게 내성적이고, 지독하게 치열하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놓인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자신의 독자성 을 유지하며 부유하고 싶어한다. <해와 달>은 그러한 욕망을 중요한 축으로 한, 무협의 형식을 빌은 욕망의 환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들에게 결코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에 완간되지 못한 만화 <해와 달>이 연재중단될 때, 권가야는 백 일홍이 죽고, 백일홍의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져서 키워진다는 스토리가 남아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 그것은 권가야 나 름의 해결책이었는지도 모른다.  

 

3. <야후 >. 격동의 80년대 후반을 지나는 두 아들의 이야기.  

  만화 <야후>의 감정표현은 그 만화적 표현의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와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이 만화가 한국 현대사의 80년대 후반을 바탕으로 약간의 픽션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는 리얼리즘적,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 기 때문만은 아니다. 윤태호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대한 묘사는 그의 과감하고 거친 만화적 연출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확하게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 하며, 만화의 주된 테마로 상정되어 있다.  

  보일러 수리공인 아버지는 죽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서. 하층계 급인 아버지의 아들의 이름은 김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내리며 쇼핑중인 사람들을 생매장시켰던 대사건, ‘삼풍백화점 붕괴’를 직접적으로 지칭하 고 있음에 틀림없는 이 만화 속의 사건에서 김현은 가장 극단적인 ‘부성과잉의 폭발’을 체험한다. 그 때까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갔던 솔직하지 못 한 애증의 관계는 차마 해결될 틈조차 주지 않고 괴물처럼 순식간에 김현을 덮쳐버렸다. 한번도 삶을 제대로 향유해보지 못한 아버지. 남에게 굽실거리 고 참는 데에 익숙한 아버지.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관심한 번 제대로 보여준 적 없는 아버지. 순식간에 비참하게 죽어버린 아버지. ‘야후’라는 괴물의 이 름은 이러한 피해의식이 형상화된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김현과 같은 반의 고교생이며 김현과 마찬가지로 부성과잉, 모성부재의 주인공 ‘신무학’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김현 의 아버지가 깔려죽은 건물의 주인이다. 즉, 신무학의 아버지는 김현의 아버지를 죽여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으깨진 아버지와 으깨어버린 아버지. 마 르크스적 개념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표현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만화 <야후>는 80년대 후반의 정치적인 격동과 부성과잉, 모성부재 속 의 아들에게 형성되는 자의식의 폭발력을 단단히 얽어매어 놓는다. 어쩌면 80년대의 격동은 남자들의 독점적인 문화로 표현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당시 사회진보의 가장 주축세력이었던 학생운동 세력 역시 남성적인 폭력성에 일정이상 의존하였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폭력과 혼돈의 시대였 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폭력과 혼돈은 가부장제 내의 폭력과 혼돈 위에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의 시스템과 사회적 시스템 의 연관관계는 윤태호의 <야후>에서 이룩한 성과이다.

 

김현 과 신무학은 같은 고교, 한 반의 동급생이다. 여기에서 윤태호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아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테두리로 묶어놓는다. 그것은 역시 이제 지겨운 소리지만, 부성과잉과 모성부재의 아들이라는 동질성이며, 같은 사회현실 속의 아들이라는 동질성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는 지배 계급의 아버지이든 피지배계급의 아버지이든 사회를 떠받치고 가야 했던 아버지들을 그 누구도 떳떳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지배계급은 못 살 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잘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아버지들의 아들들이다. 

김현 은 부자집 아들인 신무학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는 듯이 표현되었고 신무학은 돈이 없으면서도 오만하고 당당한 김현을 동경하며 그가 받은 상처가 자 신의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것은 아버지가 가진 돈 뿐이며 그 아버지는 아들의 동창생을 정부로 두려할 만큼 인격적으로 치 졸한 인간이다. 때문에 그는 김현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야후>의 최근 스토리는 이러한 신무학의 변신 이야기이다. 그는 자 신의 아버지를 부정하며, 아버지를 닮아있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출신계급까지 부정하기에 이르었다. 그는 치열하게 김현이 걸어왔던 길을 뒤쫏아 달려가고 있다. 신무 학은 당대의 학생운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그는 만화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데모장면이나 정치적 이슈를 배경으로 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 다. 그것은 일종의 계급투신이기 때문이다.

피지배 계급의 아들인 김현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며 죄책감의 80년대 후반을 뚫고 나가려 한다. 한국의 80년대 후반은 진보운동의 가장 화려한, 그리고 거 의 최종적인 폭발기이다. 질주하는 주인공들은 아직 의 세련되고 모던한 감성의 시대, 90년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지배계급의 아들인 신 무학은 이제 자신의 계급을 부정하고 치사량의 상처를 가슴에 묻어두고 달려나가는 피지배계급의 아들을 따라잡아서 붙잡으려 한다.  

왼쪽은 1권에서 김현이 아버지가 죽은 후, 집을 팔고나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부셔버리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9권에서 신무학이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하는 장면.그는 자신의 방을 부셔버리고 있다. 같은 행동을 하는 두 캐릭터를 보여줌으로서
작가는 두 아들의 아버지와의 단절을 중첩시킨다. 만화를 훌렁훌렁 넘기며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작가가 신경써서 깔아놓은 이러한 장치들을 놓쳐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 아버지와의 단절.

  20권 분량 예정에 9권까지 발간된 <야후 >는 이제 어떠한 결론으로 달려나갈 것인지, 아직 예측 불가능이다. 아마도 아버지와 시대에 대한 분노가 캐릭터들의 성숙에 의해서 온정적으로 이해되고 타협된다... 라는 식의 결론은 아닐 것이다.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기에는 이 만화에 그려진 아들들의 상처와 분노는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1년인 지금, 죄책감이라고는 눈을 부릅떠도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은 이 시대에, 이 만화를 읽는 이유는 무엇이지? 80년대에서 90년대로 달려나가려하는 이 만화에 우리의 눈이 쏠리는 이유는? 아직 시 대는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였으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와 달이라는 만화를 인상깊게 읽어서 관련해서 서치하다 찾은 글이다.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만화 재미로 보면 보지마세요) 

이글루인가..? 그 글로 아카이빙을 하셨더니 2년 전까지는 원문(https://capcold.net/dugoboza/dugoboza_net/no003/amul/amul.html)을 잘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글자가 깨져 읽을 수가 없어서 블로그에 펌 되어 있던 걸 어찌저찌 찾아내 블로그에 아카이브 한다. 

 

야후는 이미지가 잔인해서(사람이 압사당한 걸 묘사로...) 관련한 뉴스로 별첨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9938

 

무협은 낭만이 있지...